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제국 (문단 편집) === 최종 분할 이전의 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상황 === 최종 분할된 것으로 설명되는 서기 395년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동방과 서방이 영구적으로 분열될 것임이 시간 문제처럼 보였다. 395년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이 건설되면서 제국의 헤게모니가 동방으로 옮겨지고 있었던 데다가, 당시 군대의 장교들과 여러 지식인들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에게 공동황제 임명을 요청해 2명의 황제가 제국을 분담할 것을 건의한 상황 등은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의견처럼 두 황제가 각자 정부를 거느릴 경우 제국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측하게 했다. 서로마 제국의 역사를 살펴보기에 앞서, 로마 제국 서방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의 한계와 최종 분할 이전 제국의 상황을 살펴봐야 된다. 이에 관하여 학자들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대제국의 멸망은 제정이 가진 국가 체제의 한계와 제국 안팎의 이유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서로마 제국이 왜 동로마 제국과 비교해 빠르게 쪼개지고 멸망했는지도 직•간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원전 2세기 이전인 '''[[포에니 전쟁]]''' 이래 로마 공화정은 도시국가 로마가 팽창하고 정복국가가 되면서 그 한계에 봉착했고, 공화정 후기인 기원전 2세기 이래로 로마는 일찌감치 큰 내전을 치루며 발전을 거듭했다. [[그라쿠스 형제]]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가 양분한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로 불리는 10년 동안의 내전을 시작으로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카이사르]]와 같은 [[로마군]]을 사병화한 정치가들이 권력을 쥐거나 정쟁을 벌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원로원파('''[[옵티마테스]]''')와 민중파('''[[포풀라레스]]''') 사이의 대립이 여러 형태로 지속되었다. 이는 술라의 개혁, 카이사르의 내전 승리 등을 거치며 점차 특정 개인의 영구 집권이 가능한 형태의 제정화로 흐르게 되었는데,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제압하고 소위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실질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해방자'들에 의해 암살되었고, 다시 시작된 내전은 카이사르의 양자로 외종손이 되는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후의 숙적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악티움 해전]]'''에서 격파하면서 종식되었다. 그리고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 이래 공화국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2년 뒤인 기원전 27년부터 '''《조정 헌법》'''이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공화정체의 등장과 공화정 수호''' 라는 명분으로 실질적인 제정을 창설했다. 이것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대대적인 개혁 이전까지 존속한 약 300년 동안의 초기 제정, 즉 '''프린키파투스'''('''원수정''')였다.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만들고 정착시킨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술라의 개혁 이전의 공화정, 술라의 개혁 이후의 공화정과 비교해 확실히 효율적이었고 로마 제국에게 닥친 당대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받는다. 그렇지만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황제가 스스로를 황제라고 확실히 말하기 어려운 형태의 >'형식적인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 이었다. 로마 황제로 불리는 '[[프린켑스]]' 혹은 '[[임페라토르]]'는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여러 권한들(임페리움 등)을 원로원의 승인, 군대의 충성 선언을 통해 합법적으로 수여받아 공화국인 로마를 통치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로마 제정은 동서고금의 일반적인 제정과는 여러 부분에서 그 차이점이 분명했고 이로 인한 한계와 모순도 뚜렷했다. 따라서 황제가 [[네로]]처럼 합법적으로 통치하지 않고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면, 로마법상 주권자인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모임인 로마군 및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에게 탄핵을 당하고 더 나아가면 축출도 가능했다.[* 유념할 부분이 있다면 대중들에게 폭군 내지는 암군으로 알려진 가이우스('''[[칼리굴라]]''')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카라칼라]]''')는 네로처럼 불법을 악용해 암살된 황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도리어 이들의 암살은 원로원의 카이사르 이전으로의 공화정체 회복 시도와 황제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생긴 음모로 급박하게 황제가 암살된 형태였고, 그들은 네로와 달리 현대 이후 로마사가 재정립되면서 긍정적으로 재평가 중이다. 실제로 두 황제는 수에토니우스 및 디오 카시우스 등의 편향된 주장과는 달리 암살 이후에도 그 통치 형태가 비난받았을지언정, 네로처럼 함량 미달의 황제로 공인되어 정통성을 부정받지는 않았으며 그들 가문이 멸문한 이후에도 후임 황제들에게 여전히 로마 제국의 정통성있는 황제로 평가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지를 받은 로마시민권자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우구스투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였다.''' 즉, 쌍두정 형태의 입헌군주정 내지 세습이 가능한 종신 대통령제였던 프린키파투스 체제는 상황만 된다면 부자 세습 및 형제 세습이 가능하고 황실로 불리는 가문이 생길 수 있는 입헌군주정이면서도, 승인만 되면 누구나 제위에 오를 수 있는 공화정이었다. 그래서 로마 제정은 안정적으로 운영되더라도 동•서양의 다른 제정과는 그 차이점이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된 사람의 능력이 출중하거나, 대가 끊겨 혈통적인 한계가 명확할 경우 그 유연성의 측면에서 다른 제정과 비교해 여러 이점이 존재했지만 온전한 혈통적인 정당성이 있어도 세습군주제의 장점을 가져갈 수 없었던 제정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원수정은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처럼 확실하게 탄핵된 황제가 있는 경우라고 해도, 제위를 놓고 여러 군사령관들이 다투는 경우가 발생할 경우 내전이 장기화될 위험요소가 많았다. 물론 서기 1세기 중반인 41년 1월, 20명 남짓의 근위대 병사들과 원로원 일부가 공모한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암살 사건('''[[칼리굴라 암살 사건]]''')처럼 후임자인 클라우디우스 1세를 중심으로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 민중과 원로원 내 황제파들이 똘똘 뭉쳐 즉시 반격한 경우에는 내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당대의 요세푸스와 후대의 디오 카시우스의 말처럼 공화정 회귀를 노린 일부 세력이 온전한 지지 없이 황제를 폭군으로 몰아 암살했다가 스스로 몰락한 사건에 가까웠고, 로마인들에게도 정상적인 상황을 내전으로 몰아갈 뻔한 상황에 불과했다. 어찌되었던 간에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초기 제정(프린키파투스)은 각 왕조가 몰락하거나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된 황제의 암살 등이 벌어질 경우 '''[[네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와 같은 내전이 발발할 위험 요소가 많았다. 간단히 말하면 제국은 평화속에서도 황제가 암살될 경우, 자칫 준[[내전]]에 빠질 위험성이 높았다. 문제는 이 내전이 장기화될 경우 그 혼란은 원로원이 가진 여러 권한, 각 속주 총독 및 군사령관들의 현지 병력 장악 등과 맞물리면서 더 큰 내전으로 심화될 상황이 곳곳에 산재했다는 점이다. 이런 불안 요소 속에서 서기 2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국가의 영토가 늘어나면서 넓어지는 국경을 방어할 병력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들어갈 돈은 많아졌다. 훗날의 서로마 제국이 들어서게 될 서방에서는 서기 2세기 이래 갈수록 강해지는 게르만족의 침공 빈도 증가로 많은 군인들이 필요해졌다. 하지만 네로 시대부터 본국 이탈리아와 수도 로마에서 근무하게 되는 프라이토리아니로의 병역 지원 비중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플라비우스 왕조]]'''의 초대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 이래로 로마 제국은 속주 태생 로마시민권자들의 속주병 입대를 허가했는데, 그럼에도 제국은 2,400km나 되는 서방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많은 군인들이 필요했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많은 병력 수요만큼 들어가는 물자도 많이 필요했고, 게르만족들의 침공 빈도가 높아지는 중에 그 강도까지 커지면서 대규모 전쟁의 가능성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 결과, 서기 2세기부터 로마 황제는 로마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최전선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고 이를 해결해야만 했다. 따라서 대중들에게 평화기로 알려진 서기 2세기 중반부터 서기 3세기 초까지의 로마 황제들은 수도 로마와 변경의 최전선을 오가며 격무에 시달렸는데, 우리에게 로마 제국의 현군들로 알려진 이들도 이런 상황을 해결하다가 전선에서 죽었다. '철인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황제 중 최초로 군 숙영지인 빈도보나(오스트리아 빈)에서 붕어했고,('''[[마르코만니 전쟁]]''') 철인황제의 동생이었던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게르만족의 본국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내고 귀환하던 중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이는 '제국의 마지막 황금기' 혹은 '평화의 절정'이라고 찬사받은 '''[[세베루스 왕조]]'''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원시적인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를 제시하면서 프린키파투스 체제의 모순을 개혁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역시 오늘날 [[영국]]의 [[요크]]에서 붕어했다.('''[[세베루스의 칼레도니아 침공]]''') 이런 외부적인 상황 속에서, 제국의 행정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고, 세금 징수와 속주 통치는 여전히 황제와 총독, 황제와 지역유력자 간의 서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단점이 존재했다. 이는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공화정과 전제군주정 사이의 타협점과 같은 국가 체제였던 터라 서기 4세기 이후의 전제군주정(도미나투스)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로마 황제와 엘리트들에게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따라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 중 [[오현제]]의 끝으로 불린 두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갈수록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는 속주 행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직접 명령에 대한 노력을 많이 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황제 주도로 국가 운영의 틀을 바꾸려고도 시도했다. 이는 암군 콤모두스의 치세때 방치되는 듯 했지만, 콤모두스 시대의 폐단을 수습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다시금 문제 해결을 위해 황제들은 노력하게 되었다. 세베루스 황실의 황제들은(특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지역민들이 기부한 공공건축물들을 모두 황제의 이름으로 짓도록했고 각 속주 간의 통행세 등을 황제의 이름으로 동일하게 징수하도록 했다. 아울러 로마 황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원로원 인재들 외의 기사계급 출신 관료들을 통해 행정 결정을 내리고, 지방에 주둔한 많은 수의 군대를 중앙에서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이런 조치들은 서방보다는 동방 속주들에서 그 효과가 컸고, 어떤 로마 황제도 동방보다 낙후되거나 비슷했더라도 갈수록 그 한계가 명확해지는 서방에서의 여러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일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포로로 잡은 게르만족을 광산이 아닌 이탈리아 북부나 판노니아 및 갈리아로 이주시켜 농민으로의 정착을 시도했다가 절반의 성공만 거두었고, 게르만족들이 정착한 일대는 인구가 줄거나 초토화된 곳이 많아 생산력이 낮아서 빠른 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설상가상 전염병이 돌고, 툭하면 국경 밖의 게르만족들이 침공하는 상황이 반복되다보니 서방 지역에서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다. 즉, 훗날의 서로마 제국에 해당되는 지역들은 동방과 비교해, 제국의 평화가 절정에 다다른 팍스 로마나의 후기에도 많은 군단들이 각 지역의 군사령관 내지 총독들의 명령권 아래 속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이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에 있어서 상당한 정치력과 군대 장악력이 필요한 지역들이었다. 서로마 제국 이전부터, 로마 제국은 지중해 서부와 동부 간의 경제력 차이와 원시적인 세금 징수, 노예 수급 감소, 트라야누스 시대 이후 시작된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경제력 침체 및 그 한계로 인해 동방과 서방 사이의 경제적과 사회적인 격차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벌어져 있었다. 당장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부터 원로원의 경우, 푸닉,[* 오늘날의 북아프리카 [[모로코]], [[알제리]], [[리비아]] 북부] 그리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일대 출신들이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상황이었고, 그나마 서방에서 잘 나간다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의 인재들은 몇몇 가문을 제외하고는 거진 동방 출신들에게 밀려나 있었다.[* 로마 원로원의 입회 조건은 기본적으로 재산 규모 및 출신 후보들의 추천을 해줄 인맥이었다.][* 이 부분을 현대적인 로마사의 관점으로 연구한 해먼드의 1957년 발표에 따르면, 이탈리아 출신 원로원 의원들의 비중은 [[베스파시아누스]] 시대까진 80%를 상회했고,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는 동로마 출신들을 총애한 도미티아누스 시대조차도 늘 70% 중후반을 왔다갔다했다. 그런데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는 50%대로 추락하더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즉위 직후에는 높게 잡아봐야 44%까지 줄어든 상태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오래된 귀족 가문들도 어려움을 겪거나 재산 규모가 크게 줄어, 공화정 시기의 명문가인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처럼 살아남았다고 해도 잠시 동안 원로원 의석에 복귀하지 못하는 등 고전하고 있었다. 본국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 다음으로 발전했다는 갈리아와 히스파니아 일대 및 제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된 촌놈 동네로 취급된 변경 지역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 경쟁력이 동방 속주들보다 떨어졌다. 이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자신을 지지한 발칸 반도(특히 일리리아 지방)와 푸닉 지방, 그리고 처가의 근거지인 시리아 속주 출신들을 대거 등용하면서도 이탈리아 출신들의 특권을 오히려 확고하게 인정해주었고, 서방 출신 인재들의 등용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베루스 황제를 비롯한 서기 2세기 이후의 황제들은 로마 제국 서방의 경제적 낙후 문제 해결 및 이 일대 인재들의 육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왜냐하면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연이은 대규모 건축물 축조, 세금 감면 등의 시혜책 등이 대개 지중해 동부나 수도 로마에 편중되어, 동•서간의 경제력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상황을 해결하려면 일시적인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트라야누스가 활용하고 원로원과 지역 유지들이 지지한 속주 통치 정책과 세금 징수 정책은, 과거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세 황제(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들도 이례적으로 활용했던 방법, 즉 공화정 시기에 원로원이 활용한 세금징수원을 고용해 세금을 징수하고 이를 기반으로 국가를 돌리는 운영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속주세를 쥐어짠 네로 황제를 제외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네 황제들의 속주세 징수 방향은 훗날의 트라야누스처럼 세금징수원을 보내 징수했다고는 해도, 지역 유지가 세금징수원과 연합해 징수하는 방법보다는 속주 총독과 파견 관리를 통해 징수하고 이를 산출해 재분배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당시 갈리아에서 한동안 카이사르의 해방노예 출신인 율리우스 리키누스를 동원해 트라야누스 방법으로 운영한 전례가 있긴 했다. 그런데 그 비리가 엄청났던 데다가 지역 유지끼리도 속주 총독과 어울려 파벌이 갈리는 문제가 생겨나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런 까닭에 갈리아의 유력자들까지 로마를 찾아와 불만을 토로했고, 아우구스투스가 망신까지 당하며 이를 사죄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머리 끝까지 화가 난 황제는 리키누스를 즉시 소환하고, 자신의 양자인 대 드루수스를 총독으로 보내 총독과 중앙 관리가 세금을 산정해 징수하는 방법으로 바꾸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는 지역 유지와 연합한 관리 및 세금징수원들의 횡포를 줄이는 방법을 점차 확대시키면서, 수확량을 토대로 한 속주세를 중앙에서 징세하는 방향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로마 제정은 원로원과 황제가 함께 속주세를 거두었는데, 서기 2세기 경트라야누스 황제의 방향이 간편하고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힘 있는 속주는 속주세를 많이 걷고, 혜택을 많이 보는 방향인데다가 그 중간 과정에서 비리가 많았다. 따라서 낙후된 속주가 많고, 자원은 많이 필요했던 로마 제국 서방에게는 2세기 당시 원로원과 다른 속주의 지역 유지들이 좋아한 세금 징수 정책과 재원 활용 방안이 그다지 유쾌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는 필요한 돈과 인적, 물적 자원이 늘어나는 현실과 맞물리면서 2세기부터 로마 황제들의 고민을 더 깊어지게 했고, 그럴수록 서방은 동방과 비교해서 황제들의 능력치를 많이 요구했다. 다행히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위기에 빠진 본국 이탈리아와 갈리아 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경제 규모를 유지시키기 위해 자금을 쏟아붓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국고 잉여금을 확보하는 국고 확장 및 긴축 정책을 활용하여 급한 불을 끄게 되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런 조치들은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성장 동력을 잃고 정체된 서방의 도시 경제가, 과거 발전 동력을 갖췄던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의 시대처럼 재도약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로마 제국과 서방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붕어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가 공동황제로 즉위한 그 해부터 자연재해와 외적의 침략 등을 받으면서 큰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시대부터 제국의 서방과 동방에서 연이어 외적의 침공이 벌어지게 되었고 '''안토니누스 역병'''으로 불리는 대규모 전염병까지 창궐하게 되었는데, 동방에서 서방으로 퍼져나간 전염병과 레누스(라인) 강~다누비우스(다뉴브) 강으로 이어진 최전선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의 끝없는 침공은 제국의 병력 및 국고의 피로도를 가중시켰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행정부가 고도화된 행정과 사법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전문화되었고, 관료제 아래에서 그 운영이 발전하면서 이에 따른 유지 비용 역시 갈수록 늘어났던 터라 마냥 서방의 경제 문제 해결에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제국의 국고 피로도와 경제적인 취약성 속에서 기존 국가 체제의 한계와 위험요소가 대내외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소위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최악의 상황에 빠져 급속도로 제국은 쇠락해지기 시작했다. '''[[군인 황제 시대]]'''를 거치면서 황제가 수시로 교체되자 황권은 추락했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가자 각지에서 반란을 비롯한 불온한 움직임이 심상치않게 가시화되었는데, 이는 당장이라도 제국이 대혼란에 빠질 위험성을 가중시켰다. 결국, '3세기의 위기' 또는 '군인 황제 시대' 등으로 불리는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은 과거 콤모두스 시대를 거치며 겪은 혼란 이상의 난세 속에서 고생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이 혼란을 제대로 수습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집권 이전까지 어떤 황제도 여러 이유로 인해 이를 말끔히 해결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부자 황제의 경우, 발레리아누스가 '''[[에데사 전투]]'''에서 참패해 사산조 페르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갈리에누스는 건국 이래 맞딱뜨린 최악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정신이 없었다. 가까스로 제국을 재통합한('''[[로마 재통합 전쟁]]''')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태양신 솔 인빅투스의 대리인으로 명시될 황제 중심의 강력한 전제군주정 개혁을 추진하던 중 비리를 저지른 측근 에로스의 농간으로 암살되었고,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의 이점을 살려 통치한 [[프로부스]] 황제는 원로원과 서민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중세 농노제를 연상시키는 경작지 개간과 도시 재건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손에 의해 어이없이 암살되었다. 서기 3세기의 내전은 장기화되었는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같은 인물들의 집권과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아이밀리아누스]] 같은 야심가들의 연이은 등장으로 애매모호한 모순점이 가득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가진 정치적 혼란 증폭 위험도는 높아졌다. 그래서 3세기 동안 중앙에서는 여러 야심가들의 제위 쟁탈전과 각 속주 총독들의 황제 선언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제대로 된 정치가 불가능해졌고, 신병 충원 이후 활용될 병력의 제대로 된 방어 전략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서방과 동방 전선에서는 여러 이민족이 침공하면서 로마 제국의 군사력은 이에 대응하며 제국을 방어해야만 했다. 다행이라면 제국의 각 지역이 모두 이런 준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피해가 누적된 곳은 제국 동부 일대보다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서부 일대, 즉 훗날의 서로마 제국 일대였다. 상술했듯 [[플라비우스 왕조]] 이후부터, 제국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반도와 그 북부에서 블록경제로 경제적 규모를 키운 갈리아 남부의 경제적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서기 3세기 동안 게르만족의 침공이 갈리아 중심부까지 이어져 피해 규모가 커지면서 치안까지 불안해지게 되었다. 내전 기간 동안 탈영병들과 유랑 농민들이 무장한 도적이 되었고, 연례 행사처럼 게르만족이 침공하는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동방보다 낙후된 서방의 경제 상황을 갈수록 악화시켰다. 더욱이 영구 분할로 불리는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붕어 이후, 서로마 제국 관할에 속할 지역들은 풍요로운 그리스, 아나톨리아, 레반트, 이집트를 두루 가진 동로마 제국과 비교해, 푸닉 지방(옛 카르타고 지방) 외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곳이 적었고 서기 2세기 중반 이래 굵직굵직한 권세가까지 배출하지 못하여 중앙정부의 관심에서도 상대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서로마 제국의 상황이 향후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이 될 것이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카리누스]] 황제를 무너뜨리고 단독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연이어 발생하는 반란을 모두 제압하고, 급상승하는 물가를 통제하며 국경 지대의 불안을 해소하고, 고도화된 행정에 대한 통제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를 실행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전제군주정을 실시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거의 50여 년 동안 지속된 혼란 때문에 제국의 경제와 행정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피폐해졌다. 그렇기에 [[3세기의 위기|군인 황제 시대]] 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누더기가 된 제국을 '''테트라키아'''('''[[사두정치]]''')를 통해서 통치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황제 한 명이 통치하는건 힘들었기에 제국을 분할해서 2명의 정제와 2명의 부제를 두고 각 지역을 다스리도록 한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진 퇴위한 후 로마 제국은 부제들간의 내전에 돌입했다.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치하던 제국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자진 퇴위한 후 3명의 부제가 추가적으로 더 출현해 제국을 사실상 5등분해 다스렸다. 그리고 이 '''[[사두정의 내전]]'''의 최종 승자는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쟁쟁한 경쟁자인 4명을 배제하고 313년 로마 제국의 유일무이한 단독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비교적 안정화되었지만, 과거의 로마 황제들이 그랬듯 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한들 역시 슈퍼맨은 아니었기에 대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뛰어난 식견 및 능수능란함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은 서방에서의 모든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따라서 대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붕어 이후 그의 아들들인 [[콘스탄스]]와 [[콘스탄티누스 2세]] 사이에 일어난 내전과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배교자' [[율리아누스]]의 통치를 거치면서 로마 제국은 서서히 쇠락해졌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단절 이후 짧게 통치한 [[요비아누스]] 황제의 붕어 이후 로마 제국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황제들이 제국을 양분해서 통치했는데 [[발렌티니아누스 1세]]~[[그라티아누스]] 황제까지는 그래도 서방의 로마군이 멀쩡했다. 오히려 이때는 서방군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고트족에게 개박살난 동방군을 도와주러 발칸 반도 쪽으로 원정을 갈 정도였다. 그런데 383년에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제국 서방의 양 군대는 루테티아(파리) 인근에서 크게 한판 붙었는데 무어족 기병대의 배신 때문에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붙잡혀서 죽었다. 이어서 4년 뒤에는 이탈리아에 있었던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박살이 나 동방으로 망명해버렸다.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는 반역자들을 무찌르고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복위시켰으나 이 와중에 [[플라비우스 아르보가스트]]가 발렌티니아누스 2세와 갈등하여 황제를 암살하고 [[에우게니우스|플라비우스 에우게니우스]]를 제국 서방의 황제로 옹립했다. 에우게니우스는 서방에서 [[로마 다신교]]를 부흥시켰고, 이것이 테오도시우스 1세의 어그로를 끌어버리는 바람에 394년 8월 '''[[프리기두스 전투]]'''에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끄는 동방군에게 공격받아 서방의 정예군이 개박살이 나고 아르보가스트와 에우게니우스 역시 참수당해 메디올라눔(밀라노)의 성문에 걸렸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을 재통합하고, 각지에서 난립하는 부제들을 격파하여 불안정한 정국을 안정화시켰다. 특히 당시 논쟁거리였던 기독교 교리 문제를 해결하고, [[이교도|이교]] 금지 정책을 확실하게 실시해 기독교를 로마 제국 전역의 유일 종교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서방 문제를 해결하던 중 모든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메디올라눔에서 붕어하고 말았다. 문제는 이런 내전을 세 차례나 치렀더니 서방군이 아주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제 테오도시우스 1세 역시 이것을 인지하고 서방군을 재건하려고 했지만 몇 개월만에 급사해버렸고, 로마 제국의 서쪽 절반의 미래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멍청한 아들이었던 [[호노리우스]]와 [[플라비우스 스틸리코]]에게 맏겨지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